< 1910년 >
경주시 동단에 위치한 감포는 현재 인구 7,000여명으로, 일제에 의해서 키워진 항구도시이며, 일제강점기 전 감포는 항구도 포구도 아닌 그저 자갈과 모래가 쌓인 바닷가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1910년 대에 들어서 감포 내에 내항 방파제가 축조되었고, 항구의 입지를 갖추게 되었고, 1920년 본격적으로 감포항이 개항되면서부터는 동해 어업의 주생산지 역할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일본 태평양 연안 시코쿠 지방에서 터전을 잡고 살던 일본인들이 자국의 어족 자원이 고갈되자 일본정부가 대대적으로 펼친 정책의 하나였다.
< 1930년 >
일본 어민들의 문제는 이미 구한말 때부터 시작된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세토나이카이의 어장이 줄어들면서 어민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본정부는 한반도로 눈을 돌렸고, 1908년에 한일어업협정을 계기로 정착비를 지원하는 등 어민들의 감포 이주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코쿠 지방의 수산업자와 어민들이 감포로 몰려와 살게 되었다.
< 감포항 >
과거 감포항은 제물포항만큼 튼 항구였으며, 적산가옥과 같은 과거가 많이 남아있는 도시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인물만 조명하고 있으며, 과거 수탈의 대상이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것 만큼 기록도 기억도 희미하다.
과거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의 가장 큰 항구 중 하나였던 감포에서 이를 조명하고자 한다.